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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서유럽/┣ 이탈리아(完)

제노바에서 피사 가는 길에 본 대리석 산지 까라라

From Genova to Pisa

 

 

 

 

하룻 밤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던 제노바

 


 

제노바는 이탈리아 제1의 항구로 밀라노 토리노와 더불어 북부 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다.

밀라노·토리노의 공업지대가 배후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출입항으로서도 중요하며,

전통적으로 많은 선박회사가 이곳에 본사·지사를 두고 있다.

 

  

 

  

 

 

 

 

 

아펜니노 산지가 바다까지 다가와 있기 때문에 제노바 시가지는 산허리에 있으며,

제노바 시를 통과하는 철도의 대부분은 터널을 지나간다.

 

 

 

 

 

 

 

우리는 제노바를 떠나 피사로 향하는 중이다 

 

 

  

 

 

 

 

 

 

제노바에서 피사로 달리는 도중, 내가 가보고 싶어하는 친퀘떼레를 지났을 텐데,

아무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봐도 어디가 친꿰떼레인지는 알 수가 없다.

 

  

  

 

 

 

 

 

친퀘떼레 (사진 출처:http://paper.cyworld.com/rememberence/1590966)

 

   

   

 

 

 

 

la spezia (라스페찌아) 를지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곳에서 해부도를 그렸다던가...

 

   

 

 

 

 

 

언뜻 보면 눈 쌓인 산처럼 보이는 이 곳은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까라라(카라라) 석산이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찾았던 곳이라 하며

밀라노, 피렌체, 피사, 바티칸의 대성당들이 모두 이 곳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한다.

 

   

[Carara (까라라) ]

 

 

 

대리석의 생산과 가공 그리고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라 해야 할 까라라아푸안 알프스 산맥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그 주위는 흔히 대리석 지대라 해서 연상되는 황량한 모습과는 달리 푸른 구릉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까라라라는 대리석으로 유명한 이 도시의 이름 자체도 어원학적으로 살펴보면 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도시의 형성 배경이 전적으로 대리석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워낙은 평화스러운 리구리언-아푸안 종족의 작은 마을로 생겨났지만, 그 주변에 매장되어 있는 대리석 광물의 개발과 그것을 최초로 상업적으로 이용한 로마제국 사람들에 의해 까라라는 인근 도시인 루니(luni)와 함께 대리석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천혜의 대리석 자원, 마치 도시를 감싸듯 껴안고 있는 산지와 구릉지대, 그리고 앞에 마주하고 있는 지중해로 인한 수송의 용이함 등의 조건이 국토의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풍부한 이태리 전역 중에서도 까라라가 생산지로서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 이유라 하겠다.

이런 조건으로 해서 이 도시는 주변 강대세력의 끊임없는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까라라 지역의 대리석 매장량은 무진장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한 광맥이 수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한다. 까라라와 백대리석은 동의어가 될 정도로 현재 백대리석은 이 지역의 주요 광물이자 산업기반이 되어 있으며 다른 종류의 대리석 역시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곳이 세계적인 대리석 생산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역사적 기원은 멀리 로마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2세기 전에 로마 제국은 융성하는 국가적 부를 과시하고 장치적인 위업 등을 기념비적인 건물 등으로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광범위한 건축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사용하던 재료는 뚜포(tufo)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전시대의 것보다는 강도와 밀도에 있어서 향상된 것이나 또한 많은 한계를 지닌 재료였다. 그 기본재료 외에 뻬뻬리노(Peperino)라는 얻기 쉽고, 다루기 쉬운 재료가 장식을 해야 할 부분에 사용되었다. 그 후에 회반죽을 발라 그들이 원형으로 삼고 있던 그리스 대리석 건축물들을 모방하려 하였다. 기원전 15세기에는 이 회반죽 대신 뜨라베르띠노(travertino)라는 것으로 대리석을 흉내내곤 하였다. 그 시기에 종종 대용품이 아닌 대리석 자체를 건축물의 표면 재료로 사용하는 건축물이 지어졌다.
이때의 대리석은 그리스에서 수입해온 것이었고 그것도 이미 완성되어 있던 그리스 건축물에 사용되었던 부재를 노략질해 자기들의 건축에 이용하는 문화적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다 서기전 500년 경부터 까라라 주위의 대리석 광맥이 발견되면서 제정로마시대의 대리석 수요를 대부분 감당하게 되었다. 특히 아우구스또(Augusto)황제 시대 이후부터는 수적으로 늘어가고 규모가 장대해져만 가는 건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 그 수탈은 더욱더 가중되어 갔다. 중세 이후에는 플로렌스( Florence), 피사(Pisa),시에나(Sienna) 등지의 로마 주변의 많은 도시 국가에서 건설되는 종교건축 등의 기념비적 건축을 위해 까라라의 대리석은 더욱더 공급을 늘려야만 했다.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수요의 증대는 더욱더 가속화되어 갔고,
몇몇 유명한 당시의 조각가와 건축가들은 자기의 예술적 이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대리석을 직접 찾으러 이곳에 와 머물기도 하였다.
그들 중에서는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브르넬레스키(Brunelleschi) 등도 있었다.이들이 이곳에 머물며 해발 1000미터 이상이 되는 대리석 채취장까지 오르내렸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이곳 까라라 사람들의 자랑이 되곤 한다. 

 

 글 출처:http://blog.naver.com/wodltlsrja/140031703789

 

 

 

 

 

 

  

 

  

[ 가장 품질 좋은 대리석을 생산해내고 있는 대리석 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