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동유럽. 상하이/┣ 폴란드(完)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

ⓡanee(라니) 2008. 4. 9. 14:54

라쿠프에서 서쪽으로 60여m를 달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만든 집단 수용소가 있는 오시비엥침, 우리에겐 아우슈비츠라 잘 알려진 이 곳에 도착했다. 

이 수용소는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1940년에 설립되어 폴란드인의 학살 장소로 이용할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 유럽인들, 특히 유럽 각국에서 각각의 국적을 얻은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들까지 이 곳으로 보내짐으로써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던 나라들의 국민들에게 5년간 공포감을 안겨주었던 곳이다. 이렇게 유럽 각지에서 끌려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이 곳에서 학살된 사람이 400만명 이상에 이른다고 한다.

이 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고압전류가 통했었을 수용소의 철책, 영화 속에서 보았던 몇몇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제 2 수용소에 비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제 1 수용소

 

 

 

 

 

제 1 수용소 정문에는 독일어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기만적인 문구가 쓰여 있는데

이 문구를 제작한 유대인들은 'B' 글자를 왜곡된 모양으로 만듦으로써 나치에 대한 저항심을 몰래 담았다고 한다.

이 문을 통해서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나간 사람들은 12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만 했다.

 

 

 

 

철문으로 된 정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으로 스물여덟 동의 건물이 3열로 늘어서 있다.   

 

 

1동 2층 4호실 한 쪽 벽에 수북히 전시되어 있는 가스통

한 통으로 400명을 한꺼번에 독살 할 수 있도록 나치가 개발한 것이라고 하니

전시되어 있는 가스통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동 2층 5호실

모두 7톤이 발견되었다는 유대인들의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으로 만든 원단 

 

 

5동 

브러시 종류, 신발, 트렁크, 식기, 신체 장애자의 의수족 등 개방 후 발견된 희생자들의 소지품이 전시되어 있다.

 

 

새로 도착한 수감자가 찍어야 했던 사진   

 

 

줄무늬 죄수복은 천이 얇아서 혹독한 추위로부터 수감자들을 지켜줄 수 없었으며

속 옷은 몇 주 또는 몇 개월간 세탁도 못하고 갈아입지도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전염병이 유행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6동 전시물 

나치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했던 사진을 보며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5동

수감자들의 국적별 전시장 중 하나인 폴란드 전시장

 

 

총살의 벽

10동과 11동 사이의 총살의 벽(죽음의 벽)에서 이 곳을 보러 온 많은 유대인 학생들을 보았다.

이 곳을 보는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10동 창문에는 나무판이 붙어 있는데 그 곳에서 자행된 사형집행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11동 수용소에서 격리된 형무소

1층과 지하실은 당시 그대로 남아 수감자들이 겪었던 비극을 전해 준다. 

 

 

잔혹했던 이 역사의 현장 위로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그림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11동, 21동, 28동 옆 철책과 감시초소

 

 

28동 수용소 내부 병원

열악한 환경은 전염병의 원인이 되었고 수용소 안의 병원은 항상 만원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SS의사들은 중환자와 회복기 환자를 정기적으로 선별하여

회복 가망이 없는 환자들은 가스실에 보내지고 하고 이 곳 병원에서 심장에 페놀 주사를 놓아 죽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수감자들은 이 병원을 '화장터의 현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태인의 수난과 투쟁에 대해 알 수 있게 전시해 놓은 곳

 

 

 

 

 

점호광장으로

 

 

점호 광장(1번 사진)과 취사장(2번 사진) 

점호시 SS가 수감자들의 수를 확인하는 장소인 취사장 옆의 조그만 광장에서는

이동교수대 또는 집단교수대가가 설치되어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사형집행이 거행되기도 하고

수용소 수감자들이 강제노동에 나가고 들어올 때는  SS대원이 몇 천명이나 되는 수감들의 행진을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수용소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스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교수대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사형을 집행한 교수대로 화장터 입구 앞에 있다. 

 

 

 

제 1 가스실/화장터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바깥에는 화장터가 있다.

 입구로 들어 가서 첫번째로 나오는 커다란 방은 사체 안치소였던 것을, 후에 가스실로 개조한 것으로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소련군 포로와 실레지아 지방의 게토(유대인 지구)에서 연행되어 온 유태인들이 독살되었다고 한다.

 뒤 쪽 방에는 2대의 화장을 위한 가마가 남아 있는데  원래 3대의 가마가 있던 이 곳에서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 하루 평균 350구의 시체가 화장되었다고 한다.

 

 

SS병원

 

  

 

초스피드로 1시간만에 수용소를 둘러 보고 수용소를 빠져 나왔더니

우리가 타고 가야할 6시 버스가 이미 와서 대기 하고 있다.

좀 더 여유있게 둘러보았으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좀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이다.

 

 

버스를 타고 출발을 기다리며 창 밖을 내다보니 태어난지 얼마안된 강아지가 아장아장 귀엽게 주인을 쫓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너무나 아름다운 하늘처럼 새 생명인 이 강아지 또한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찬 이 역사적 장소에 대조되는 모습이다. 

 

 

크라쿠프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