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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서유럽/┣ 이탈리아(完)

폼페이 1 포로(Foro) - 공공광장

 

2008년 1월 3일 (목)

 

 

*Ranee in Pompei

-Foro(공공 광장) & 바실리카-

 

  

 

 

 

폼페이 도착

초등학교 시절,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이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오래도록 나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하나의 영화 장면처럼 자꾸 떠올리며 몸서리치곤 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평생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각인된 그 곳에 이렇게 서게 되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든다.      

 

버스에서 내리니 길을 따라 온통 오렌지와 레몬을 파는 가게들이 줄을 서 있다. 폼페이하면 유적지만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나주하면 '배' 대구하면 '사과'하는 것처럼 폼페이는 '레몬'의 원산지란다. 

 

 

 

 

 

  

폼페이

사르노 강 포구와 바다 사이에 자리잡은 폼페이는 지리적 특성으로 지중해를 지나던 항해가들이 즐려 머물던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오스키 족이 기원전 8세기부터 폼페이에 정착해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단기간 내에 폼페이는 주변의 그리스 식민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고 에쿠르스키 족과 활발한 상거래를 하였으며 그 후 산니티 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산니티 족이 통치한 기간(기원전 425)에 폼페이의 건축 양식과 도시 구조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고 한다. 로마가 산니티 족을 무찌른 후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며 로마의 풍습과 문화, 발달된 로마의 건축 양식이 폼페이에 급격히 전파 되었다. 통상 고대 로마의 체계적인 도시 계획은 바둑판 형태를 유지하나 로마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의 도시 구조는 예외적으로, 지형적인 특성과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에 건립된 건축물이 남아있어 불규칙한 도시 구조를 갖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폼페이 중심을 지나는 주요 도로에 따라 9개의 지역으로 구분했으며(오늘날에 구 (區)에 비유할 수 있음) 각 지역은 동네로 다시 분리되고 집집마다 번지 수가 매겨졌다. 폼페이 시 전체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6개의 출입문이 있다.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와 2만여명의 주민이 대피할 틈도 없이 화산재에 파묻힌 비운의 도시 폼페이,  지난 1500년동안 어둠에 묻혀 있다가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그 찬란했던 시절의 문화와 생활 모습을 공개하게 된 폼페이 유적지를 보기 위해  우리는 마리나 문을 향해 걷고 있다.  

 

 

 

 

 

 

 

 

 

 

 

포르타 마리나 문 

폼페이 유적지에는 마리나 문,  스타비아 문, 사르노 문, 노라 문, 베수비오 문, 에르콜라 문이 있지만 현재 폼페이 유적지 관람은 마리나 문을 통해 입장하고 있다.

<포르타 마리나 문>이란 <바다를 향해난 문>이란 뜻으로 예전에는 바닷물이 이 곳까지 들어 왔었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경치를 즐기는 민족이라 우리나라와는 달리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란다. (즉 폼페이는 로마귀족들의 휴양도시였다는 얘기)  

  

 

 

 

 

 

 

 

마리나 거리

마리나 문을 통과해 마리나 거리를 걷고 있다. 마리나 대로의 우측에는 당시 경제와 사법의 중심지였던 바실리카가 있고 마리나 대로 가  끝나는 지점에 장방형의 포룸(중앙공회장)이 있다.  

 

 

안전을 위해 박아놓은 흰돌

이 흰돌은 달빛을 받으면 야광처럼 빛나는 돌로 가로등이 없던 옛날 안전을 위해 박아놓은 것이라 한다. 

 

 

마리나 대로를 걸으며 대로 양쪽의 유적지를 들여다 보는 사람들

 

 

 

 

 

 

 

당시 폼페이에서 번영하던 직물 산업을 위한  건물이었던 에우마키아의 집

 

 

 

 

  

 

 

 

바실리카 (법원)

재판소 역할을 했던 바실리카는 기원전 120년에 건립된 로마 시대의 집회장으로 건물의 일부와 기둥이 남아 당시의 위엄을 전하고 있다.

  

 

 

 

 

 

 

 

Foro (중앙 공회장, 공공 광장)

이 곳은 마차가 들어올 수 없도록 통제된 보행자 전용의 구역으로써 도시 전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둘레에 있는 건물들은 정치, 종교, 경제, 행정의 역할을 맡는 중요한 곳이었다고 한다. 뒤로 보이는 산은 폼페이에 재앙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베수비오 산이다. 이중식 활화산으로 79년에 폼페이를 매몰시킨 대분화 이후 8회의 폭발이 기록되어 있다.(현재는 휴화산)

 

 

공회장의 북쪽에는 기원전 2세기에 건립된 제우스 신전(사진의 A 부분에 해당)이 있고 양측에는 두 개의 기념 아치 티베리오 개선문이 있으며(사진의 B부분에 해당)  광장의 서쪽에는 아폴론 신전이 있다.

 

 

제우스 신전과 티베리오 개선문

양쪽에 개선문을 거느린 제우스 신전은 폼페이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으로 안에는 제우스, 헤라, 그리고 미네르바의 3신상이 있었으며 사제만이 여기에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측량소에 모아둔 당시의 유물들 (위쪽에 있는 사진 C부분)

우리나라 같으면 박물관에 귀중히 모셔놨을 법한 유물들이 참 허술히도 전시되어 있는 것 같다. 진짜 귀한 것들은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거나 어쩌면 복제품이 아닐까?

바로 눈 앞에 놓고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2000년의 세월도, 그 엄청난 재앙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화산재로 덮힌 후 시간이 지나면 유기물은 부패하고 건조되어 그 안의 내용물은 다 없어지고 빈 공간만 남게 된다. 거기에 석고를 부어서 죽을 당시 상태대로 재현해낸 것을 저렇게 전시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