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북유럽, 러시아/┏ 러시아(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박물관 (겨울궁전)과 전시물들

ⓡanee(라니) 2009. 10. 1. 15:28

2009년 7월 30일 (목)

 

 

  

Ranee in Saint Petersburg

 

-에르미타쥐 국립 박물관(겨울궁전)-

 

  

 

 

 

 궁전 다리에서 본 네바 강변의 에르미타쥐 박물관 (박물관 뒤쪽 모습)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를 지나 삼위일체 다리를 건너 버스가 멈추어 선 곳은 

재정 러시아 황제들의 겨울 거처였던 겨울궁전 앞이다.

네바 강변을 오갈 때마다 몇번이나 보았던 곳인데 이제서야 오게 되다니...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지만 사진 속에서 수 차례 본데다가 오가면서도 몇 차례 보아 그런지

하얀 기둥이 조화를 이룬 담색의 외관이 낯설지 않고 매우 익숙한 느낌이다.

 

 

 

176개나 된다는 겨울 궁전 지붕의 조각상들 

 

 

등대에서 겨울 궁전까지

궁전다리 하나만 건너면 다다를 곳이었는데...

 

 

 

  

현재 에르미타쥐 박물관 (에르미타쥐 미술관)다섯 의 건물 중 하나인 겨울 궁전은 

제정 러시아 황제의 겨울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제의 명령으로

1754년 이태리 건축가 바르토로미오 라스트렐리의 초안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1762년에 완공한 궁전이다. 

4개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의 겨울 궁전은

1057개의 방과 117개의 계단,1886개의 문, 1945개의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엘리자베스 여제의 초상화(1758년)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인 에르미타쥐 박물관겨울궁전을 포함하여 5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품 수집광이었던 예카테리나 2는 자신이 사들인 소장품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그 소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겨울궁전 옆에 小(말르이) 에르미타쥐 舊(스타르이) 에르미타쥐,에르미타쥐 극장을 연이어 증축하고

이어 新(노브이) 에르미까지 신축했다고 하는데

그 뒤 소비에트 연방정부가 이 건물들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국립미술관으로 만든 것이 에르미타박물관이다.

 에르미타쥐에는 페테르부르크 시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의 귀중품들이,

小 에르미타쥐에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집권할 당시 세계 각지 (특히 서유럽)에서 수집해 온 진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新 에르미타쥐에는 니콜라스 2세의 유품과 당대의 희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의 이름이 에르미타쥐라고 붙여진 것은 캐서린 여제가 겨울 궁전을

'은둔지'라는 뜻의 프랑스어 에르미타쉬로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현재 이 박물관의 소장품은 300만점이 넘는다고 하며

이 소장품들은 서유럽관, 고대유물관, 원시문화관, 러시아 문화관, 동방국가들의 문화 예술관

고대화폐 전시관 등에 나뉘어져  전시되고 있다. 

(300만점 중  4000점은 에카테리나 여제가 서럽에서 사들인 것들임)

300만이라는 숫자는 막연하게 '많구나' '크구나'라고 말 할 수 있는 숫자이긴 하나 

일상 생활에서는 사실 300만 개를 헤아릴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양이 어느 정도 되는지 피부에 잘 와닿지 않는 숫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300만이나 된다는 그 소장품의 양이 얼마나 엄청난 양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따라다니는 설명이 있다.

에르미타쥐에 전시된 작품들을 한 점당 1분씩만 본다고 해도 총 관람시간 이 5년이나 하는...   

 

  

 

 

1엔 원시문화예술 홀, 고대 이집트 문화 예술 홀,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 홀, 동양 문화 예술 홀 등이 있으나 이 곳은 패스... 

  

 

 

 

요르단 계단(대사의 계단)

대부분 사람들의 박물관 관람은 이 계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이 계단은 외교 사절들이 황제들을 만나기 위해 오르내리던 계단이라 대사의 계단이라 불리기도 하고(18세기),  

19세기엔 매년 1월 황족들이 네바강에서 세례의식을 치르기 위해 이 계단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요르단 계단으로 불리기도 하는 계단이란다.  

 

 

 

 

겨울 궁전의 거실로 쓰였던 방들과 전시실로 쓰이는 방들

 

 

 

 

표트르 홀 (1833년)

표트르 1세를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트르 홀은 소규모의 리셉션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 홀의 벽들은 은실로 수놓아진 벨벳 천으로 씌워져 있으며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의 벽에는 표트르 1세가 미네르바 여신과 함께 있는 장면이 묘사된 그림이 걸려 있다.

또한 표트르 대제의 낙관과 왕관, 쌍두 독수리 등의 황제를 대표하는 상징 요소들로 장식되어 있다.     

 

  

 

 

문장(紋章) 홀

이 곳은 스타소프에 의해 지어진 문장관으로 러시아 군인 조각이 세워져 있고

현청 소재지의 문장이 달려 있던 창이 있으나 문장은 후에 훼손되어

지금은 문장으로 장식된 금방패 판만이 청동 샹들리에를 장식하고 있다.  

에르미타쥐의 1057개의 방 중 400여개의 방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넓은 이 이 곳이란다.

 

 

 

전쟁 갤러리 

1812년 로시의 설계에 의해 지어져 나폴레옹 군대 퇴격의 기념일인 1826년 12월 25일 개장 되었다.

이 곳에는 전쟁에 참여했던 장군들과 또 전후 장군 계급을 받은 이들의 332점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전쟁 갤러리 

갤러리에는 초상화가 걸리지 않은 빈자리(초록색)도 보이는데

이 것은 작품을 미처 남기지 못했던 사망자 13명의 초상화를 위한 자리가 남겨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쿠투조프 장군의 초상화 (1829년)

카잔 성당 앞에서 동상으로 이미 보았던 조국 전쟁의 영웅 쿠투조프의 초상화다.

 

 

  

  

 

 

  

게오르기 홀(황제의 집무실)

1795년 완성된 게오르기 홀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까지 차르(황제)가 어전 회의를 하던 곳

  

 게오르기 홀의 전시물

  

 

게오르기 홀의 바닥과 천장의 문양  

 

 

   

 

 

 

르네상스, 고전주의, 모리타니아 양식의 특징을 융합하여 장식한 小(말르이) 에르미타쥐의 파빌리온 전시관  

 파빌리온 전시관의 황금공작새 시계

18세기 후반 영국의 기계 공학자 제임스 콕스가 제작한 것으로

네 시간마다 공작이 날개와 깃털을 펴면서 울었으나 지금은 특별한 날에만 울린다고 한다.

 

파빌리온 전시관의 전시품  

    

 

 

 

 

  新(노브이)르미라파엘 회랑 

 

1770년대 말 무렵 에카테리나 2세는 1516년에서 1518년사이 라파엘과 그 제자들에 의해 제작된

바티칸 궁전 회랑의  프레스코모사할 것을 주문한다.

이 모사화는 템페라 기법으로 캔버스 위에 운테르베르게르페테르에 의해 제작되었고

11년 후 이 곳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50년 가량이 지난 후 부분적으로 개조되어

그 인테리어와 유화 앙상블이 박물관 건물구조로 포함되어졌다고 한다.

<라파엘의 성경>이라 명명된 이 대작은 결국 에르미타쥐에서 세 번이나 탄생되었다는 얘기다 . 

천장과 복도의 벽마다 다양하게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서 복도를 지나가는 맛이 일품이다.  

 

  

 

 

발쇼이 채광창(skylight)관

新(노브이) 에르미가장 큰 세 개의 홀은 大(발쇼이) 이탈리아 채광창관, 小(말르이) 이탈리아 채광창관, 스페인 채광창관으로 이들은 大(발쇼이) 채광창관으로 통칭되고 있다고 한다. 이 대형 홀은 건축가에 의해 16세기에서 18세기의 이탈리아 회화와 스페인 회화가 전시되도록 특별히 설계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관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7세기 중반

창작의 재능 이외의 모든 현세의 복지를 상실한채, 고독의 상태에 처한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담은 듯한 작품  

 

 

 

 

 

 

 공작석 응접실 

 니콜라이 1세의 왕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녀가 사용하던 곳으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8세기 당시만 해도 매우 드물게 사용되던 공작석은 보통 담배갑, 필기구, 장식 병의 세공에 쓰이곤 했는데 1830년대 이 광석층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우랄 탄광이 개장된 후로 이 광석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공작석 응접실의 원주에는 '러시아식 모자이크' 라는 고난도의 기술이 사용되었고 벽의 한 면에는 낮과 밤, 그리고 시를 의인화한 비유적인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공작석 응접실 

 

 

 

 니콜라이 1세의 왕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칸딘스키의 컴포지션 5

 

 

 

 

 

 

르느와르, Lady in Black, 1876
 

 

 

 르느와르, 여배우 Jeanne Samary의 초상, 1878

   

 

  

 

 

 

 

 

폴 세 , Still Life with Apples

 

 

 

폴 세잔, 흡연자, 1895-1900 

 

 

 

 

로댕, 영원한 봄, 1897

 대리석 군상 <영원한 봄>은 다수의 복제품에 의해서도 유명한 작품으로

조각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다.  

 

 

 

 

반 고흐, 오막살이, 1890 

에르미타쥐에는  반 고흐의 작품이 네 점 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드라마틱했던 말기에 제작된 작품들로

<에덴 동산에의 기억><4월의 아레나><관목><오막살이>인데

그 중 위 사진 속의 작품<오막살이>는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1890년에 오베르에서 제작한 것이라 한다.

 

 

  

 

 

 

폴 고갱, 과일을 든 여인,1893 

 

 

 

폴 고갱, 기적의 샘물 (달콤한 몽상), 1894

 에르미타쥐는 폴 세잔,  반 고흐와 함께 20세기 예술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폴

고갱의 작품도 15점 소장하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고갱이 타이티에서 생활했

 시시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앙리 마티스, 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앙리 마티스, Dance, 1910

        이 그림은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활기

        있는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 

 

 

 

 

 

앙리 마티스, Music , 1910

 

 

 

앙리 마티스, 붉은 방, 1908

       마티스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가미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 세

       계를 완성시켜 나갔는데 이 같은 장식성은 이슬람교와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마티스가 비서구적인 예술 형식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앙리 마티스,  대화, 1909

 

 

 

앙리 마티스, 가족 초상화,1911

        마티스는 사진술이 초상화가들을 몰아내고 있기 때문에 화가는 초상화에서

        빛과 무늬를 더욱 풍부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그림에서 보면 현란한 카페트와 벽무늬, 체스판 무늬, 또 소녀의 검은 원

        피스,이 모두를 조화로운 협화음 속에 통일 시키면서 대상이라기 보다 무늬

        로 표현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 Portrait of Lydia Delectorskaya, 1947

 

 

 

 

 

 

 

  

 

  

파블로 피카소,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인, 1901

   

 

파블로 피카소, The Visit (Two Sisters). 1902 

    1901년부터 4년, 무명의 피카소의 미술을 사람들은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석탄을 캐는 노동자나 다름없던 파리의 궁핍한 청년 미술가였던 시절이다.

    는 형언할수없는 불안감과 슬픔을 새로운 '블루'로 표현했다고 한다. 

 

 

 

 

 

파블로 피카소,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 1908 

 

  

파블로 피카소, 숲의 요정, 1908 

  

 

 

파블로 피카소, 세 여인, 1907-1908 

 

 

 

  

 

 

 궁전광장

에르미타쥐  박물관 (에르미타슈,  에르미따쥐 미술관) 정면의 구참모본부 건물이 휘감고 있는 이 광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의 심장부인 궁전 광장으로 러시아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러시아 혁명 전에는 말을 탄 황제가 이끄는

화려한  군대행렬의  장소이기도 했으나  1905년 1월에는 군대가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대학살을 한 '피의 일요일'

현장이기하고 1917년 11월 7일엔 볼셰비키 혁명이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광장의 중앙에는 알렉산드로프 전승 기념비가 솟아 있다.   이 기둥은 1812년 나폴레옹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1834년 알렉산드르 황제가 세운 것으로 빨간 화강암 기둥의 무게는 무려 600톤에 이른다고 한다.  기둥 꼭대기에는 십자가

를 안은 사상이 얹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