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중국/╂ 중국 태원,평요,면산(完)

[중국 산서성] 민간의 자금성 '왕가대원'

ⓡanee(라니) 2012. 9. 9. 14:14

 

2012년 7월 23일 (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민간의 자금성 '왕가대원'

 

 

 

이 곳은 산서성(山西省) 영석현(靈石縣) 정승촌(靜升村)에 위치한 왕가대원 앞 입니다. 왕가대원상업(두부 장사, 소금장사)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하고 청나라 때는 4대 명문가 중 하나가 되었던 정승 왕씨(靜升 王氏)가문의 17대손인 왕여총, 왕여성 형제가짓기 시작하여 300년간 지은 대저택으로 '황제에게 자금성이 있다면 민간에는 왕가대원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대저택입니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감잡을 수 없는 분들을 위하여 그 규모를 숫자로 나타내자면 총 면적 4만5천 평방미터에 총 1,118칸의 방과 113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진 저택이라 하네요.

와우~  정말 대단하지요? 

저택 안에는 교육시설, 방위시설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우람한 솟을 대문과 조각이 곁들여진 멋진 담장, 곳곳의 조각상들이 볼거리를 더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성곽이 저택을 감싸고 있어 여행객들의 눈을 만족시켜 줍니다.       

왕가대원은 크게 동쪽의 고가애(高家崖) 서쪽의 홍문보(紅門堡)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여행객들은 고가애(高家崖)를 먼저 둘러보고 나서 고가애(高家崖)와 홍문보(紅門堡)를 잇는 다리인 운교(雲橋)를 건너 홍문보(紅門堡)를 둘러본 후 홍문보(紅門堡)에 있는 문으로 빠져나오는게 일반적인 관람 방법입니다.     

[고가애쪽 입구와 망면각(望綿閣)이라는 입구 위의 누각]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입구를 통과해 비탈길을 오릅니다. 비탈길 벽에는 액자들이 걸려 있는데요 이곳 왕가대원에서 촬영된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면들을 담은 사진 액자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극과 영화들이 우리나라의 옛 모습을 배경으로 담기 위해 한국민속촌에서 촬영되는 것처럼 이곳도 중국의 과거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곳이란 뜻이겠지요. 

[왕가대원에서 촬영된 영화의 사진 액자들이 걸려 있는 입구쪽 벽]

 

 

 

비탈길 뒤로 입구 위의 누각인 망면각(望綿閣) 보이는데요 저 누각에 올라 면산(綿山)을 바라보면 한눈에 면산(綿山)을  볼 수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 합니다.

[입구를 통과해 올라오는 비탈길 뒤로 보이는 망면각(望綿閣)]

 

[입구 위에 세워져 있는 누각인 망면각(望綿閣)과 정원]

 

 

 

고가애(高家崖) 쪽 입구를 통과하여 비탈길을 올라 첫번째 보이는 집을 먼저 둘러 봅니다.고가애(高家崖) 저택은 대대로 장사를 하여 거부가 된 정승 왕씨 가문의 17대손이면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높은 벼슬에까지 올라 명문가를 형성한 왕여총(王汝聰), 왕여성(王汝珹) 형제가 살던 저택인 듯 한데 아마도 첫번째 보이는 집이 형이 살았던 집이고 그 다음으로 보이는 집이 아우가 살았던 집인 듯 합니다.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올리고 싶어 몇날 며칠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지만 개인 홈피나 블로그에 실린 글들은 제각각이고 신빙성 있는 정보를 올린 싸이트도 찾을 수 없어 글을 쓰는게 조심스럽고 어려움이 많네요.

[고가애쪽 저택(右)과 저택 앞 조벽(左)] 

 

 

 

형의 집 앞에도, 아우의 집 앞에도 조벽(照壁)이 세워져 있는데 형의 집 앞에는  원형 안에 두 마리 사자가 여의주를 두고 희롱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조벽(照壁이 세워져 있습니다. 원형이 상징하는 것은 모든일이 순리대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산서성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문양이라 합니다. 구룡벽이나 칠룡벽은 왕가의 상징이었고 민간에서는 이렇게 사자가 들어간 조벽을 많이 세웠다고 하네요.

[사자 문양이 새겨져 있는 조벽]

 

[조벽 맞은 편의 저택 입구와 높은 신분임을 상징하는 저택 입구 앞의 사자상]

 

 

 

 

이 곳의 가옥들은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안채와 곁채 등 4개 건물이 동서남북 ‘ㅁ’자 형태로 둘러싼 구조인 사합원(四合院) 형태입니다. 북을 정방(正房), 동서를 각각 동상방, 서상방, 남을 문방이라 하는데 안채인  정방(正房)에는 주인이, 곁채인  상방에는 주인의 아이들이나 아랫 사람(후손)이 기거했으며 문방에는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돈이 많거나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큰 저택의 경우에는 사합원이 몇개씩 병렬로 되어 있고 사합원의 담장과 길가 쪽의 방에는 밖으로 난 창문이 없고 닫힌 구조로 되어 있어 조용하고 사람 살기에 적합한 구조라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답답한 감도 없지 않아 있는 듯 합니다. 

[사합원 형태의 가옥구조]

[손님들이 머물던 객사]

 

 

 

가옥마다 마당(정원) 가운데에는 물을 담아 놓은 독이 있습니다. 이 독(항아리)을 '드므'라고 하는데 '드므'는 화마 (火魔)가 불을 내러 집에 들어왔다가 물에 비친 험상궂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게 하려는 것으로 화재를 예방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드므'는 평소엔 주술적 상징으로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할 수 있겠고 실제로 불이 났을 때는 방화수(防火水)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마당 가운데에 놓여 있는 물독]

 

[고가애와 홍문보로 이루어진 왕가대원]

 

 

 

객사를 지나 더 안쪽 깊숙히 있는 이곳이 주인이 기거했던 곳인가 봅니다. 사합원 형태인 건 마찬가지인데 앞서 보았던 객사와는 달리 2층으로 되어 있네요.  정방(正房) 2층에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고 상방 도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2층으로 되어 있는 가옥의 모습]

 

 

 

정방(正房)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마당에 '드므'화분 몇개가 보이는데요 가옥들마다 공통적으로 마당에 나무를 심는 대신 화분을 놓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로 가옥의 형태가 사합원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자의 입구(口)자 모양인 네모난 사합원 마당에 나무(木)를 심으면 빈곤할 곤 (困)자가 되기 때문에 나무를 심지 않고 이렇게 화분을 둔다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 싶지만 뭐 좋지 않은 건 피하는게 좋겠죠.^^

[사합원 마당의 모습]

 

 

 

 

이 가옥의 안채인데 이곳은 우리의 온돌과 비슷한 난방시설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우리의 온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방 전체에 온돌이 깔려 있어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침대처럼 일부분만 데울 수 있게 해 놓았고 화로를 설치 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방의 구조는 굴방식 구조로 황토지대인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아치형 동굴가옥 형태인 요동(窯洞)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 방식이 남아 있는 것인 듯 합니다. 하지만 모든 방에 이런 시설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원 안의 수많은 방들 중 일부에만 설치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온돌 침대와 화로]

 

[요동과 비슷한 아치형 구조의 방]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의 조각]

 

 

 

2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2층엔 누군가를 모신 사당처럼 보이는 곳이 있는데 왕씨 가문의 시조인 왕실(王實)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신이겠지요. 재물을 관장한다는 관우신처럼 말이예요. 

[2층의 사당(?)]

 

 

사당(?)이 있는 2층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상당히 답답해 보이지요. 북경이나 산서 지역의 건축 양식이 이렇게 폐쇄적인 모습으로 발달한데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답답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2층에서 내려다 본 가옥의 모습]

 

 

 

저택 내의 미로 같은 길을 요리 조리 돌아 두번째 저택으로 향합니다.

저택 곳곳에 이렇게 경사면을 해놓은 이유는 배수를 위해서라 합니다.

 

 

 

 

 

아우가 기거했었던 곳이라 추측되는 두번째 집 앞입니다. 사실 첫번째 집에서 두번째 집으로 이동할 때 두번째 집 정면의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 돌아보고 나오니 두번째 집 앞이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돌아본 코스의 반대쪽인 저택의 대문 앞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다음 사진은 첫번째 집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조벽이예요. 첫번째 집처럼 대문 앞에 조벽이 세워져 있는 건 같은데 다만 문양은 좀 다르네요. 첫번째 집 앞의 조벽에 사자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것과는 달리 두번째 저택 앞 조벽에는 박쥐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박쥐를 뜻하는 중국어 발음과 돈을 뜻하는 중국어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박쥐가 중국에선 부귀를 상징하는 동물이랍니다. 이렇게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도 더 부자가 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단지 그 부를 지키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대대로 부유했던 왕씨 가문도 결국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니 이런 걸 아무리 세워놓는다 해도 천년만년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부귀를 상징하는 박쥐 문양이 새겨진 조벽]

 

 

 

두번째 집 대문 앞에도 첫번째 집과 마찬가지로 사자상이 있습니다. 문턱의 높이는 지위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데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동생이 더 높은 벼슬을 지낸 까닭에 동생 집 문턱이 형의 집 문턱보다 더 높았다고 하네요. 대신 형은 동생집보다 더 화려하게 잘 꾸며 놓고 살았다고 하구요.

[지위를 상징하는 대문의 문턱] 

 

 

 

집 앞에 세워져 있는 돌조각은 하마석(下馬石)이라 하는데 말을 탈 때 사용하는 디딤돌입니다. 이런 돌들조차 부귀에 따라 크기나 모습에 차이가 있다고 하네요.

[하마석(下馬石)]

 

 

 

첫번째 집과 마찬가지로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객사일 것 같고 여기가 주인들이 기거했던 곳 같습니다. 첫번째 집과 거의 유사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네요.

 

 

역시나 마당엔 드므와 화분 몇개가 놓여져 있는게 보이구요 중국인 안내원이 관람객들에게 벽에 장식된 조각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모습이 보입니다. 

 

 

 

벽에 장식된 이 조각들은각각의 의미가 있는데요 각 거처에 기거하는 인물들에 맞게 새겨넣은 조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아들의 거처엔 부모 봉양이나 입신 양명 등의 의미를 담은 조각들, 며느리의 거처엔 훌륭한 아들 생산이나 시부모에게 효심을 다하라는 의미의 조각들을 새겨넣은게 아닐까요. 아들은 그렇다 쳐도 힘깨나 쓰는 집안이다 보니 며느리는 참 어깨가 무거웠을 것 같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계단 난간에도 아기자기한 동물 형상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는게 보이는데요 이 동물 형상 하나하나에도 집안의 번영과 자손들의 발전을 기원하는 내용이 숨어 있다고 하네요. 계단 맨 아래쪽의 복숭아를 안은 원숭이 조각장수출세를 상징하는 조각이라 합니다. 복숭아가 장수를 상징하는 것이고 원숭이 후(猴)와 제후(諸侯)의 후가 중국어로 발음이 같아 원숭이는 벼슬, 출세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정말 길이길이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나 봐요.

그 밖에도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나 출세를 의미하는 잉어 같은 다양한 형상들이 계단이나 문턱에 조각되어 있었는데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사진으로 담아오지는 못했네요. 

[계단 난간의 동물 형상 조각들]

 

 

 

2층으로 올라 가면서 곁채인 서상방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봤습니다. 아들과 딸이 미혼일 때,  또는 결혼했을 때 그 거처가 조금씩 달랐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썼는지 위, 아래층으로 나누어 썼는지...

아무래도 미혼인 딸은 조금 더 사람들 눈에 덜 띄는 곳에 기거하지 않았을까 싶어 이 방의 주인을 이 집 딸인 아가씨로 잠시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여자가 13세가 되면 시집을 가야한다는 의미에서 딸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13개로 되어 있다고도 하던데 세어본 바가 없어서 사실 여부는 모르겠네요.

[2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2층 서상방 내부 모습]

 

 

 

정방(안채) 2층에도 첫번째 집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사당 비슷한 것이 있는데 사당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안에 모셔 놓은 인물상만 사진으로 남겼더니 이 앞에 향불을 피워놓는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거든요. 이 인물상들이야말로 이 왕씨 가문의 주요 인물들일 겁니다. 가운데 인물상이 두부장사로 돈을 번 왕씨 가문의 시조 왕실일 것 같구요 양쪽의 인물상이 이 집안을 빛낸 왕씨 가문의 17대손인 두 형제인 것 같습니다.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지까지는 모르겠네요.  

[왕씨 가문의 시조 왕실과 왕가대원을 짓기 시작한 왕씨 가문의 17대손 두 형제]

 

 

 

2층에서 다시 이 집을 내려다 봅니다. 첫번째 집에서 볼 때 보다는 덜 답답한 듯 느껴지는군요. 그새 익숙해진 건지 아까는 보이지 않던 지붕의 굴뚝까지 보입니다. 굴뚝 모양도 신경 좀 써서 만든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조형미가 멋진 굴뚝들]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와  남쪽의 문을 지납니다. 곁채  옆으로 작은 문이 있어 들어가 보니 이런 건물이 있네요. 위층에서 모여 식사를 했다고 하니 위층은 식당으로 사용되었던 곳인가 봅니다. 빨리 돌아보고 나오라 재촉하는 통에 안쪽까지 들여다 보지는 못했는데 아래쪽은 아마도 음식을 만들던 곳이 아니었을까요?

 

 

 

건물 안을 이리 저리 누비다 보면 곳곳에서 아름다운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각들 중에는 입체적인 조각들도 있고 건물 벽을 장식한 부조들도 있는데요 주로 장수, 건강, 다산, 효 등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천년 장수를 의미하는 학과 만년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왕가대원에는 교육시설도 갖추어져 있다고 했는데요 이곳이 바로 왕씨 집안 자제들이 다닌 교육시설인 양정서숙(養正書塾)입니다.  입문에는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새겨져 있네요.

[대나무가 새겨져 있는 양정서숙 출입문]

[양정서숙]

[돈이 가라 앉아 있는 양정서숙 마당의 '드므']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출입문의 대나무 조각도 그렇지만 머리 속의 지식을 상징한다는 호박 모양의 이 조각 장식도 교육시설에 어울리는 장식이라 생각되는군요.

[머리 속의 지식을 상징하는 호박 모양의 조각 장식]

 

 

 

 

 

두번째 집과 교육시설까지 둘러보고 나와 나무 앞에서 잠시 숨을 고릅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참 신기하게 생겼네요. 나무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닉네임을 붙이자면 우산 나무 혹은 파라솔 나무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한 여름 더위를 피하기에 딱 좋은 모양을 하고 있네요. 

[우산처럼 생긴 나무]

 

 

 

 

이제 고가애(高家崖) 벗어나 홍문보(紅門堡)로 향하려 합니다.

이 문만 지나면 고가애(高家崖)와 홍문보(紅門堡)를 이어주는 다리인 운교(雲橋)가 나오겠군요.

 

 

 

 

운교를 건너기 전 잠시 쉬면서 10위엔하는 땅콩 과자를 사먹었습니다. 여러 가지 견과류에 엿을 섞어 절구에 찧은 후 넙적하게 펴서 네모지게 잘라 과자처럼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인데요 한 입 무는 순간 고소하고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마구 행복해지더군요. 먹을수록 강하게 남아 있는 맛 때문에 한 번에 다먹진 못했지만요.  

[고가애와 홍문보를 잇는 운교(雲橋)과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홍문보의 모습]

 

 

 

 

한참을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제법 아프기 시작하네요. 그래서 체면 불구하고 바닥에 털썩 앉아 땅콩 과자를 먹기로 했습니다. 먹다가 무심코 내려다 보니 하수구 하나가 보이는데 이런 하수구조차 재물을 상징하는 동전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네요. 이 왕가대원에서 재물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과연 뭘까요?

[재물을 상징하는 동전 모양의 하수구]

 

 

 

 

운교를 건너 홍문보로 넘어와 백가성가훈전(百家姓家訓展)이라 쓰여 있는 현판이 걸린 곳으로 들어가 봅니다. 현판에 쓰여있는 百家姓家訓展이란 글로 액자에 무엇이 끼워져 걸려 있는지는 짐작이 되시겠죠? 그런데 이 액자에 들어 있는 내용물들은 단순히 전시만 하는게 아니라 판매도 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인지 사진촬영도  못하게 해서 처음에 모르고 찍은 이 사진 한 장이 전부네요.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 골목길을 다시 걷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집에도 현판이 걸려 있는 걸 보니 무언가 볼거리가 있을 것 같군요.

고가애와 달리 홍문보의 가옥들은 이런 전시관이며 박물관들로 이용되는 곳이 여럿되어 보입니다. 

 

[북쪽으로 난 경사길]

 

 

 

 

이 집은 일종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집으로 왕씨 가문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글과 그림들이 걸려 있고, 청나라 말기 서양제국의 군대에 쫓기던 서태후가 시안으로 도망 가다가 이 왕가대원에서 하룻밤 묵어 가게 되었던 일화를 꾸며놓은 미니어처 전시물 등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박물관 같은 곳에서 나와 가던 길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꺽어지니 나무와 꽃밭이 있는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옵니다. 이 일대는 주로 이 집안의 연로하신 어른들이 기거하던 곳이라 하네요.

조금 넓직하다 싶은 공간에선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나 이런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을 볼 수 있는데요 이 꽃신들은 중국스런 느낌이 강해서 기념품으로 하나 사오고도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막상 한국에서 이런 걸 어찌 신고 다닐까 싶어 마음을 접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원처럼 생긴 이곳에서 동그란 벽돌문을 지나 성벽 입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홍문보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나오거든요. 

 

 

 

 

홍문보 위쪽 성벽에서 보면 이 저택의 엄청난 규모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크기가 자금성의 왕족 생활공간보다도 넓었고 한 때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활했던 공간이이니 집작할만 하지요?. 

 

 

 

 

성벽의 북쪽으로는 황토 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요동(窯洞)이 보입니다. 토굴 가옥인 요동은 단열이 잘되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산비탈에 위치하여 식수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도 있다고 하네요. 

예로부터 산서성에 유난히 동굴집이 많았던 이유는 자연활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산서성은 황토고원에 위치하여 대륙성 기후를 띄기 때문에 맑은 날이 많고 강수량이 적어 건조한게 특징인데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맹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선 동굴집이 적격이었던 거죠.

[홍문보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홍문보 주변의 요동 형식의 집들]

 

 

 

 

 [지붕의 섬세한 용마루와 굴뚝들, 고운 자태로 서있는 누각]

 

 [잔잔하게 펼쳐져 있는 홍문보의 지붕들과 지붕의 아름다운 용마루, 버드나무가 서있는 정원]

 

[성벽의 누각들]

 

 

 

홍문보 저편의 왕가대원과 비슷한 저 건물은 신축중인 호텔이라고 합니다. 호텔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왕가대원과 흡사하게 만들다니 ... 완공되면 호텔도 관광상품 역할을 하게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요. 

 

 

 

북쪽 성벽의 서쪽 끝에 이르러 서쪽 성벽을 타고 내려가기 전 왔던 곳을 되돌아 봅니다. 성벽 옆으로 계단이 보이지만 이왕이면 성벽을 타고 내려가며 주변 경관을 더 즐겨야겠지요? 

 

[서쪽 성벽]

 

 

 

서쪽 성벽 아래로도 요동 형식의 집들이 보이는데 이 집들은 요동 형태와 사합원 형태를 합쳐 놓은 것처럼 보이네요.

[요동 형식의 집들]

 

 

 

 

 

이번엔 지붕의 모양을 눈여겨 볼까요. 산서성 건물의 지붕은 재물이 모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가 올 때  빗물이 밖으로 흐르지 않고 집안으로 흐르게 안쪽으로만 만들어 놓았다고 하던데 여기서 보니 정말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게 보이네요. 정말 재미있는 발상인 듯 합니다. 

[집 밖으로 빗물이 흐르지 않게 만든 지붕 형태]

 

[서쪽 성벽]

 

 [서쪽 성벽에서 바라본 홍문보 전경]

 

 [서쪽 성벽의 관광객들]

 

 

 

홍문보의 가옥들이 나중에 지어진 가옥들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더 커보이고 조금더 화려한 느낌이 드는 듯 합니다. 세월의 깊이가 덜 느껴지는 듯도 하구요. 왼쪽으로 보이는 누각처럼 생긴 것은 예전의 우물터인 봉황인데 오른쪽 끝에도 똑 같은 우물터인 용담이 있습니다. 

[우물터와 정원]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홍문보 전경입니다. 가운데 보이는 남북으로 연결된 비탈길이 홍문보의 주축을 이루는 길이구요 이 길을 동서방향으로 난 세 개의 길이 '王'자 형태가 되도록 가로지르고 있는데 가로지르는 길은 더 높은 곳에서 봐야만 보일 것 같네요.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홍문보] 

 

 

 

남쪽 성벽의 누각(보루)에서 잠시 쉬다가 내려와 남쪽 문을 빠져 나옵니다. 사실 성벽이 아니라 담장이라 해야 맞는 것 같은데 담장이라 표현하기엔 그 규모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성벽이라 표현해 봅니다. 

 

[홍문보의 남쪽 문] 

 

 

홍문보 구석구석까지 돌아본 것도 아닌데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이 정도만 돌고다리가 엄청 아프네요. 한참을 쉬다가 비탈길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합니다.   

 

 

 

 

왕가대원 입구 앞 주차장까지 다 내려왔습니다. 주차장 옆의 이곳은 공자 사당문묘인데요 개인적으로 중국을 여행 중이라면 들려볼만한 곳이지만 단체여행객들은 그냥 지나치게 되는 곳입니다. 담장 조벽엔 여덟 마리의 잉어가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르다 그 중 한 마리가 용문을 뛰어넘어 용이 되는 과정을 조각으로 새겨놓았는데요 바로 등용문을 표현한 조각입니다. 이 조벽은 민간이 만든 것으로 중국의 3대 구룡벽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 옆에 우뚝 솟아 있는 탑은 문필탑(文筆塔)이란 이름을 가진 탑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탑입니다. 이 문묘 주변에 자리한 왕가의 자손 중 300여명이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나갔다 하니 등용문과 문필탑이 영험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제 왕가대원을 떠나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면산으로 향합니다. 가슴이 처음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하네요.  

[공자 사당인 문묘의 조벽과 문필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