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그리스. 터키/┗ 터키(完結)

이스탄불의 상징, 아야 소피아(하기아 소피아)

ⓡanee(라니) 2008. 10. 12. 11:27

2008년 8월 7일 (목)

 

 

 

 

Ranee in Istanbul

-아야 소피아-

 

 

 Aya sofya

중세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middle ages) 중 하나로 터키 건축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야 소피아...

916년 동안은 교회로, 481년동안은 모스크로, 1935년 이후로는 박물관으로 생명을 이어온 비잔틴 성당의 최고 걸작, 성 소피아 성당을 만나 보자.

 

 

 

 

   

 아야 소피아의 구조

아야 소피아는 중앙의 거대한 돔을 동서쪽에 있는 두 개의 반 돔으로 받치는 돔양식 건축물로 지진으로 건물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바깥에 부벽을 쌓았으며 (이 보수공사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진행했다고 함) 4개의 미나레가 있다. 

4개의 미나레  벽돌로 된 것은 무하마드2세 때 처음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만들었던 목재 미나레를 대체한 것이고 나머지 3개

미마르 시난 세운 것이다.     

 

 

 

 

 

 

 

 

 

 

분수(Fountain) 

 

터키 여행을 꿈꾸며 가장 와보고 싶었던 소피아 성당 앞에 섰다.

지금까지 유럽에서 보아왔던 성당들과도 사뭇 다르고 그렇다고 터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미(모스크)들과도 차이가 있는 그런 건축물,

그래서 내겐 참으로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곳이다.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자 이스탄불의 상징인 이 곳은,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는 곳으로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크기로는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의 두오모이어 세계에서 4번째 교회라고 한다.

 

값이 두 배로 오른 티켓을 구입할 땐 속이 쓰렸지만 티켓을 구입한 후 아야 소피아를 바라보니 희안하게도 쓰린 속이 가라앉으며 잠시 잊고 있던

기쁨과 환희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이 곳이 정녕 TV 속에서, 사진속에서 수도 없이 나를 유혹했던 바로 그 곳이란 말이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교회당 터

 

검색대를 통과한 후 아야 소피아로 들어서려는데....

'이게 뭐지?'

입구쪽에 건물은 없고 무엇이었을지 모를 터만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궁금했지만  그 때는 내가 가진 책에 그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궁금증을 품은채 지나쳤는데 집에 돌아와 궁금증을 해결할 요량으로 책을 뒤적여 보니

마침 그에 대한 설명이 쓰여 있다.

  

그리스어로는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라는 뜻) 터키어로는 아야 소피아로 불리는 성 소피아 성당은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 의해 처음 건립되었으나

2번의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537년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된 것인데  이 터는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세운

최초의 소피아 성당이 시민들의 폭동에 의해 불타 없어진 후, 415년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지은 두 번째 교회의 일부 흔적이라고 한다. 

이 두 번째 교회도 532년 <니카의 폭동> 때 전소되어 1936년 발굴 작업 때 그 터가 발견된 것인데

이 두번째 교회 위에 아야 소피아를 지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발굴 작업은 어렵다고.  

  

 

 

 

 

 

 

외랑을 지나 내랑에 서서 황제의 문(제국의 문: 황제와 주교만 이용했던 문) 위쪽에 있는 모자이크화를 바라 보았다.

<축복을 내리는 예수>란 모자이크화로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한 왕좌에 앉은 예수가 오른손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왼손에는 그리스어로

'너희에게는 평화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라고 쓰인 성경을 펼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의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이 성모 마리아, 오른쪽이 천사 가브리엘이며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무릎을 끓고 있는 이는 레오 6세(886-912)란다.

(이 모자이크화는 그의 재위 기간에 만들어진 것임)

아야 소피아의 초기 모자이크화는 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으로 소실되고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화들은 이코노클래즘이 끝난 843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코노클래즘으로 인한 100년동안의 공백으로 인해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화처럼 이코노클래즘이 해체되자마자 만들어진 9세기의 작품은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아마도 이 곳은 메인 홀로 이어지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기술이 향상될 때까지 기다렸다 만들 수 없었나 보다.  

 

  

 

 

 

불가사의 한 거대한 돔

 

황제의 문을 지나 내진로 들어섰다. 영상을 통해 이미 본 적이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짐작하는 거랑 실제

보는 것이 그 느낌에 있어 얼마나 큰 차이가 날 수 있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보수를 위해 가운데 떡 버티고 서있는 높게 치솟은 설치물만 없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걸....

원래  아야 소피아의 중앙홀은 1층에 있을 때나 2층에서 내려다볼 때 그 규모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도록 기둥이 전혀 없게 

설계되어 있는데 홀 가운데를 거대한 설치물이 차지하고 있으니 여간 거북스러운게 아니다.  

이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인 직경  50m의 은 바닥에서부터 55m의 높이 위에 기둥 하나 없이 떠 있어 불가사의하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건물로 치자면 20층 높이와 맞먹는다고  함)

거대한 의 둘레에는 40개의 창문이 있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아야 소피아로 들어선 것을 기념하며 찍은 티켓 사진^^ 

 

 

 

 

 

 

  

보수로 인한 설치물 때문에 전체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야 소피아 내부의 전체 사진(위의 왼쪽)은 책 속에서 퍼왔다.

2층 황제의 문이 있는 쪽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가운데 미흐랍이 있고 미흐랍 위쪽으로 성모마리아 모자이크화가 있으며, 알라와 무하메드 그리고 알라의 사도들의 이름이

새겨진 원반들이 보인다. 

 

 

 

 

1453년 성당에서 이슬람 사원이 된 아야 소피아.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기존의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슬람 사원의 건축물과 장식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코란의 문구를 새겨넣은 스테인드 글라스도 그 중 하나. 

아야 소피아성당에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자미)로 바뀌면서 또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기존의 십자가를 떼

내고 메카 방향을 알려주는 이슬람 사원의 상징인 미흐랍을 만든 것과 4개의 미나렛을 세운 것으로    (미흐랍: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를 하는 방향,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있음)  미흐랍은 보통 정가운데 있어야 하지

만, 메카는 동남쪽 방향에 있고 아야소피아의 제단은 동쪽 방향을 향하고 있어 미흐랍의 위치가  15도정도 비뚤

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미흐랍 바로 위 반원돔에는 어린 예수를 무릎에 앉힌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화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가브리엘 천사가 보인다.

왼쪽에는 미카엘 천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소실된 상태.

두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이색적이다. 

 

 

성모마리아 모자이크화

 

 

 

 

 

 

 성모마리아 모자이크화를 보는 딸

 

 

 

 

 

민바르

미흐랍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 곳은 금요 예배 설교를 하는 곳인 민바르라 한다.  

 

 

 

 

 

 원반들

이슬람교는 우상 숭배를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이슬람의 그 어떤 건물에도 성화나 성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내부 장식은

성화나 성상 대신 컬리그래피(calligraphy)로 장식된다.

컬리그래피란 미술용어로 글자 형태나 배열에 따라 아름답게 쓰여진 문자나 필법을 뜻하는데 원반에 새겨진 글자를 보면 동양의 것과는

또 다른 웅장한 멋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한 녹색의 원반에 금색으로 새겨져 있는 글자들은 이름들로, 후진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이 유일신이라 믿는 알라,

왼쪽이 예언자 무하마드(마호멧)이며 나머지는 4명의 초기 칼리프(알라의 사도) 에부베키르, 외메르, 오스만, 알리의 이름이란다.  

19세기 저명한 서예가인 핫타드 놋제트 에펜디의 작품인데 세계에서 전문적인 서예가가 존재하는 곳은 한자권아랍어권 뿐으로

터키도 아타튀르크의 개혁 전에는 아랍어권에 속해 있었다고. 

 

  

 

 

 

 

 

 

 

미흐랍과 성모마리아 모자이크를 보고나자 아야 소피아에 오면 꼭 해보고 싶던 일이 생각났다.

그것은 구멍이 있는 기둥에 손가락을 넣고 돌리는 일이다.

그 기둥이 어디 있을까 휘 둘러 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 곳에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 

그 기둥은 황제의 문 오른쪽, 2층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다.  

   

 

 

 

 

눅눅해진 지주 (축축한 기둥, 훌쩍이는 기둥)

 

기둥의 물에 닿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고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는 기둥.

기둥의 움푹 들어간 곳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나머지 네 손가락이 기둥에서 떨어지지 않게 한 바퀴 돌리면서 소원을 빌어 

엄지 손가락이 축축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엄지 손가락이 축축해졌는지의 여부를 따져보기도 전에 네 손가락을 기둥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고 한 바퀴 돌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  나는 끝까지 돌려 보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신경이 쓰여서 더 어려웠던 듯...ㅎㅎ)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덧대놓은 동판이 닳아서 반질반질해진 모습을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르가마의 항아리

이 큰 항아리는 페르가몬 유적의 대리석으로 만든 항아리로 회랑의 좌우에 놓여 있다.

(항아리의 윗부분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함)

과거에는 문밖에 놓여 있어 무슬림들이 기원을 드리기 전에 그 물로 몸을 청결히 했다고 한다.

 

  

 

 

 

 

 

 

자~이제 2층(갤러리)으로 올라가 책을 통해 수없이 보았던 모자이크화들을 만나 볼 차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북쪽의 통로를 이용해서 2층으로 올라가 보자.

 

 

 

 

'천국문' '지옥문'

현재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는 아야 소피아의 2 과거, 황후를 비롯한 왕실 가족이 예배를 드렸던 곳으로 중요한 종교회

의가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통로를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천국문' '지옥문' 이라 부르는 대리석 문이 나오는데 이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

서자마자 오른쪽 벽면을 보면 아야 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꼽히는 모자이크 벽화를 볼 수 있다.

 

 

 

 

 

데이시스 모자이크(The Deisis Mosaics)  

바로 이 모자이크 벽화가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화의 백미라고 하는 Deisis(The last judgement day)인데 유감스

럽게도 모자이크의 아랫부분은 소실되었다고 한다.

중앙에는 그리스도가 왕좌에 앉아 인간적이면서도 위엄을 갖춘 표정으로 한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리스도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인류의 구원을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그려져 있다.

황제의 기증도는 그 황제의 재위 시기로 연대를 대부분 알 수 있으나 황제가 없는 이 모자이크화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

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며 다만 12-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금박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 듯 요란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중앙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기도 하는 자세인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의 고생으로 몹시 야위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만물의 지배자로서 위엄을 갖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이면서도 따스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표현되어 있다.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화들은 두 번의 시련을 겪는다.  첫 번째 시련은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

운동)의해 모두 소실되는 시련을 겪은 것이고 두 번째 시련은 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이 끝난 843년 이후에 다시

만들어진 것들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겪게 되는 시련이다. 정복자 무하마드 2세도  모자이크화의 아름다움에 감동해 그대

로 두게 했던 모자이크화들을 그의 증손대 술탄인 슐레이만 1가 이교도의 우상숭배라 하여 회반죽을 덮어버리도록 명령

한 것. 그렇게 암흑 속에 갇혀 있던 이 훌륭한 모자이크화들은 1932년 터키 정부의 허가를 얻은 미국인 토마스 위트모어

회반죽을 벗겨내는 작업을 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작업이 끝나자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4년 10월 24일 아야

소피아를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Deisis(The last judgement day) 모자이크 벽화바로 건너편 벽면의 바닥에는 제4차 십자군을 지휘했던 베네치아의

국가 원수 단돌로(Dandolo)의 무덤이 있고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두 개의 모자이크가 더 나온다.

 

 

 

 

왼쪽의 모자이크 벽화는 12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복음서를 들고 있는 그리스도를 가운데로 하고, 왼쪽에 있는 황제(콘스탄티누스 9세)는 금화를 넣은 주머니를 양손으로 들고 오른쪽의 황후(콘스탄티누스 8세의 딸인 조에)는 기증서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조에가 세번이나 결혼을 했기 때문에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 벽화의 그리스도 상은 시선이 약간 왼쪽을 향하고 있다.

오른쪽의 모자이크 벽화에는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가 가운데 있고 왼쪽에는 금화를 안고 있는 요한네스 2가 오른쪽에는 리본으로 묶은 기증서 같은 것을 들고 있는 황후 이레네가 그려져 있다. 역대 왕들은 이런식으로 아야 소피아에 기증을 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2층 갤러리 

 

왔던 길을 되짚어 반대편으로 가면 판넬로 만들어진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모자이크화나 건물 내부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다. 

 

  

 

 

 

실내가 어두워 사진을 잘 못 찍었다면 우리처럼 이렇게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한 방법.

"얘~ 이거 진짜 같지 않니?"

"정말! 진짜 같아."

우리는 신나서 사진 찍기 놀이에 열중했다.

 

 

 

 

'저 칠들을 벗겨내면 저 안에 또 어떤 모자이크화가 숨어 있는 건 아닐지...'

 

 

  

 

 

 

 

1층에서 볼 때는 어두워서 잘 몰랐었는데 2층에서 보니  아야 소피아의 벽면이나 기둥의 색이 참 다양하고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알고보니 아야 소피아를 짓는데 사용한 석재가 제국의 각지에서 운반해온 것이란다.  녹색 기둥은 에페스의 아르

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고 붉은 얼룩이 있는 기둥은 레바논에 있는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비잔틴 제국의 위력을 알만한 부분이다.  

 

 

 

 

 

 

창 밖으로 술탄 아흐멧 자미(블루 모스크)의 미나렛이 보인다.

 

 

 

 

 

 

또 다른 창으로 본 이 곳은 아야 소피아의 입구쪽 모습.

빨간 지붕과 어우러진 파란 하늘이 참 예쁘다.

 

 

 

 

 

 

2층 갤러리에서...

 

 

 

 

 

 

북쪽 상단 벽면에는 세 성인의 모자이크가 있고 이 쪽 벽면의 네 귀퉁이에는 날개가 여섯개 달린 케로빈이라는 천사가 있다.

(케로빈은 대개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함) 

 

 

 

 

 

 

 

 

 

 

 

 

 

 

 

 

 

거울에 비친 '성모와 두황제'(左)와  실제 모자이크화(右)

관람을 마치고 아야 소피아의 출구쪽으로 나가다 보면 거울에 비치는 또 하나의 모자이크를 만날 수 있다.

10세기 후반에 제작된 '성모와 두 황제'라는 작품으로 작품 속의 두 황제는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예수에게 콘스

탄티노플 성을 바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왼쪽)와 아야 소피아를 헌납하는 유스티니아누스 1다.이 도시는 콘스탄티

누스 1세가 성모에게 헌납한 것이며 성당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기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시대의 인물인 두 사람

이 쌍둥이처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리스 정교회로 시작하여  102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 당했을 때는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고

1261년 콘스탄티노플이 탈환되었을 때는 다시 그리스 정교회로 바뀌었으며,

1453년 5월 29일 파티 술탄 무하마드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엔 모스크로 쓰였고

1934년 (터키공화국 시대) 이후론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스탄불 역사의 증인 아야 소피아를 나서며 아야 소피아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술탄 아흐멧 자미(블루 모스크)를 바라본다.

아야 소피아 다음으로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이다. 

 

 

 

 

 

 

 

블루모스크를 향하여....

 

 

 

 

 

 

 

 

블루 모스크 가는 길에 다시 한 번 되돌아 본 아야 소피아.